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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힙한 요리 명장 봤어? 도전하는 명장 안유성 인터뷰

2026.06.26. KB손해보험

대한민국에서 17명 밖에 없는 요리 명장 중 최연소, 유일한 일식 조리 명장, ‘남도 초밥’의 창시자… 안유성 셰프에게 붙는 수식어는 그의 셰프 경력만큼이나 화려하고 깁니다. 요리사로서 최대의 영예인 ‘명장’ 타이틀도 받은 그가 <흑백요리사>에 나가고, 빵으로 초밥을 만드는 등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셀프 ‘변수’를 만들어내는 그의 마인드를 <제자리로 돌아오면 모두 다 일상> 편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Q. ‘흑백요리사’ 방송 이후 셰프님 패션이 화제가 많이 됐어요.

안유성 안경도 사실 브랜드인지도 몰랐어요. 제 얼굴에 잘 맞는다고 해서 안경집 사장님이 골라준 건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크롬하츠’라는 꽤 비싼 브랜드더라고요. 골라주는 사람은 따로 없고, 제가 직접 고릅니다. 일본에 연수를 자주 가는데, 거기서 ‘저 옷은 저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 싶으면 사 와서 입는데, 나중 보면 은근히 그게 또 유행을 타더라고요.

Q. 안경이랑 옷 외에도 신경 쓰시는 게 있으세요? 피부 관리에도 엄청 신경 쓰신다고요.

안유성 네, 솔직히 신경 쓰는 편입니다. 아침에 사과 한 알 먹고 운동하고, 사우나 가서 피부 관리도 하고요. 고객들 앞에 섰을 때 제 자신이 떳떳할 수 있게끔 하는 거예요. ‘저 셰프가 만든 음식은 꼭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게, 저는 프로의식이 있는 셰프라고 생각합니다.

Q. 저희 같은 연예인들은 촬영할 때만 변신을 하고 평소엔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셰프님은 식당에서도 밖에서도 늘 관리를 하시더라고요.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안유성 사우나도 하고, 와이프 팩도 훔쳐서 좀 바르고요. (웃음) 운동도 꼭 같이 가고, 아침에는 꼭 공복에 사과 하나씩 먹어요. 일단은 몸에 좋은 걸 많이 먹는 편이에요. ‘저 사람이 저런 음식을 만들면 맛있기도 하겠지만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제 자신이 건강해야 고객들한테 건강한 음식을 줄 수 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프로페셔널함이라고 생각합니다.


Q. 흑백요리사 이후에 전 국민, 전 세계적으로 스타 반열에 오르셨는데 일상에서의 변화가 있으셨어요?

안유성 저는 일상에 큰 변화는 없어요. 방송 촬영이 있으면 그때 가서 하고, 주방에 다시 들어가서 일을 하고요. 저는 공간 중에서 집이 주는 공간, 그리고 주방이 주는 공간이 가장 편한 것 같아요. 호흡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공간에만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물론 이제는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고객들이 사진 촬영을 부탁하시면 해드리고 얼른 다시 주방에 들어가서 일하고 그럽니다.

Q. 한국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오시죠?

안유성 대만, 호주, 두바이 등 세계적으로 많이들 와주세요. 그래서 ‘이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지금 지역이 어떻게 보면 소멸되고 많이 위축되고 있잖아요. 저를 보고 오셔서 하루를 묵게 된다면 지역 발전에도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제가 시에 가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예요. 사람들이 저를 보러 광주를 많이 찾아주실 때, 이때 한번 붐을 일으켜 보자는 생각을 많이 해봐요.

Q. 셰프님 덕분에 광주가 관광 코스처럼 됐잖아요.

안유성 광주에서는 호박 인절미가 유명해져서 떡집 하나가 지금 굉장히 유명해졌어요. 떡 들고 기다렸다가 사서 저희 집 들렀다가, 저녁에는 양동통닭 가서 생맥주 한잔 하는, 이런 관광 상품들이 나오고 있어요. 지역 소멸 같은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서 요즘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Q. 명장이시다 보니 본인 가게뿐 아니라 지역이 같이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경력이 약 30년 정도 되시죠?

안유성 지금 햇수로 딱 36년 됐어요.

Q. 36년이나 되셨는데 아직도 주방 청소나 재료 관리를 직접 하신다고 들었어요.

안유성 식당 운영을 하다 보면 항상 위기가 오더라고요. 그 위기에서 한 번 쓰러지지 않으려면 본인의 생명력이 강해야 하거든요. 그 생명력이 강해지려면 내가 만드는 음식만큼은 꾸준히 지켜야 해요. 어머니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전방 안 지키면 망한다”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늘 하셨던 말씀인데, 어머니가 식당을 50년 하시면서 제가 보고 배운 게 그거였던 것 같아요.

Q.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신뢰가 느껴져서, 식사하시는 분들도 ‘이건 정말 안유성 명장님의 신뢰의 맛이다’라고 느끼실 것 같아요. 셰프님만의 요리 철학이 궁금합니다. 재료에 이 정도까지 투자를 해봤다든지요.

안유성 처음 오픈할 때가 IMF가 막 지나서 굉장히 힘들 때였어요. 그 파고를 넘어서 식당을 차렸는데, 그때는 인테리어 할 돈이 전혀 없어서, 인수한 인테리어 비용에는 투자를 하지 않고 오로지 음식에만 투자했어요. 한 2년 정도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요.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게 호텔에서 주방장을 할 때였는데, 호텔은 주방 코스트(원가율)를 굉장히 따져서 32%, 30% 넘으면 안 되게끔 주방장을 굉장히 쪼거든요.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자연산 생선도 좀 드리고 싶었는데 호텔에서는 그렇게 안 되니까, 제 장사를 할 때는 ‘재료는 원 없이 한번 손님들한테 드리고, 한번 망하든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주방 코스트가 70%까지 육박해서 전혀 남지 않는 상황이 한 2년 정도 되니까, 전국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Q. 자영업 하시는 분들한테 원가율은 되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셰프님은 그걸 무시하면서까지 70%의 원가율이면 사실 남는 게 없는 거잖아요.

안유성 직원들 월급도 거의 적자였어요. 그런데 1년, 2년 가까이 버티니까 그때부터 흑자로 전환이 되더라고요.

Q. IMF 시기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안유성  그 당시 제가 일본에 연수를 가면 생참치를 쓰는 게 굉장히 부럽더라고요. 그 당시 한국에는 생참치가 없었어요, 거의 냉동이었죠. 그래서 제가 거의 최초로 생참치를 썼을 거예요.  20년 전에 3천만원짜리 참치를 해체한 적이 있어요. 업장 안에 너무 커서 못 들어와서 주차장에서 해체했는데, 그때 320kg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참치 한 마리 길이가 2미터도 넘었어요. 그렇게 주차장에서 해체해서 손님들께 드렸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 방송국에서 촬영도 했고요. 그 이후로 소문이 나서, 정말 좋은 참치가 잡히면 배에서 선장님이 새벽에라도 전화를 주셨어요. 대한민국에서 참치를 해체해서 쓸 수 있는 업장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분들이 좋은 가격을 받으려고 저한테 전화하면 탑차를 보내서 참치를 가져와 해체해 드렸고, 지금은 참치 해체 쇼가 많이 있지만 그때 당시엔 제가 거의 최초였죠.


Q. 최연소 조리명장, 참치 해체쇼도 처음 하신 분이시고요. 이 정도 위치에 오르시면 나만의 철학, 어떻게 보면 고집을 지키기 마련인데, 셰프님은 누구보다 트렌드에 민감하시다고 들었어요. 유행하는 음식을 다 찾아서 드신다고요.

안유성 네, 맞아요. 텐동 같은 게 유행할 때, 그 당시 카다이프가 굉장히 귀했었거든요. 킹크랩이나 대게는 누구나 좋아하잖아요. 그 킹크랩에 카다이프를 감아서 텐동을 만들어드리는 식으로, 계속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도전을 했어요. 근데 도전을 하면서도 ‘이것만은 지켜야겠다’ 싶었던 게, 제가 고향 광주로 내려오게 된 계기이기도 한 ‘나만의 음식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광주로 와서 남도 초밥의 창시자가 됐어요.

일본에 가면 셰프들이 저희 남도의 한국산 식재료에 관심이 정말 많아요, 오히려 더 비싸게 받고요. 그런데 한 20년 전에는 한국 사람들도 한국산 식재료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개발한 게 꼬막 초밥, 홍어 초밥, 짱뚱어 초밥, 두릅 초밥 이런 것들이고요, 지금 많이 유행하는 묵은김치 초밥이나 소불고기 초밥도 제가 처음 만든 거예요. 지금은 후배들이 많이 하고 있죠. 이게 한국식 초밥, K-푸드 초밥의 시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한 20년 전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본의 마츠도라는 스시 장인과 한국 초밥으로 겨루는 걸 찍었었거든요.

Q. 그럼 방송 출연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20년 전부터면 저보다 선배님이시네요.

안유성 어떻게 보면 그때가 방송 스타 셰프들의 첫걸음마였지 않나 싶어요. 그때 나와서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에도 나왔는데, 밥알 개수나 그램 수를 딱 맞히는 걸로 유명했었죠. 실제로 제 스승님이 신라호텔의 이병철 회장님을 모셨던 주방장이셨거든요. 그때 당시 회장님이 보통 8피스 정도 드시는데, 어느 날 6피스밖에 안 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주방장이 ‘오늘 밥알이 너무 많았나’ 생각해서 비서진들이 밥을 다 세본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는 점심에는 320알, 저녁에는 280알 정도로 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진풍경이 신라호텔 일식당 주방에서 벌어졌던 거예요. 다들 밥알 개수를 맞춰보는 거요. 저도 스승님 그걸 보고 늘 주방에서 연습을 하다 보니까 손의 감각이 꼭 저울처럼 맞더라고요. 방송에 한번 나가니까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했는데, 저는 그냥 감각적으로 늘 일상이던 거라 오히려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게 신기했어요.


Q. 도전 자체를 굉장히 즐기시는 것 같아요. 최연소 명장이 되기까지 무려 8번의 도전 과정이 있으셨다고요. 명장이 되는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안유성 명장이 되려면 일단 요리사 자격증부터 시작해서, 기능 요리 부문에서 제일 높은 단계인 ‘기능장’을 따야 해요. 특급 호텔에 요리사가 2, 300명 있어도 기능장은 두세 분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요리의 사법고시라고 할 만큼 힘든 과정이에요. 기능장을 딴 후 한 10여 년이 지나면 ‘우수 숙련자’라는 최고봉에 도전할 수 있고, 우수 숙련자가 되면 ‘준명장’이라는 칭호를 받아요. 그 후 5년에서 10년 정도 지나야 자연스럽게 명장에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돼요. 기능장을 딸 때까지 보통 15년에서 20년 정도 걸리고, 실기 위주로 시험을 보기 때문에 열 번 가까이 떨어지시는 분들도 많아요. 명장은 대개 25년, 30년은 하셔야 도전할 수 있죠.

명장 신청을 할 때는 이런 신청서를 준비해야 하는데(처음 공개하는 건데), 여기에도 노하우가 있어요. 제가 명장에 도전하기 전에 심사위원으로 경험을 해봤는데, 심사위원 입장에서 보면 저를 잘 봐달라고 이름표를 달아놓은 점수까지 찾아서 챙겨주는 심사위원은 없거든요. 그래서 심사위원 입장에서 최대한 잘 볼 수밖에 없게끔, 추천서부터 프로필, 자격증, 경력 총괄표까지 정확하게 준비해야 해요. 건강보험 자격득실 내역으로 실제 근무 여부까지 다 확인하고요. 숙련 기술 관련 항목에는 박사 학위나 논문도 들어가는데, 그게 점수로는 0.2점밖에 안 돼요. 제 인생에서 그렇게 힘들게 받은 박사 학위가 이 안에서는 0.2점인 거예요. 대외 활동 실적, 고등학교·대학교 특강 이력까지 다 들어가고요.

Q. 매출까지도 들어가나요?

안유성 그건 안 보여드리겠습니다. (웃음) 기능장 심사를 했던 이력 같은 것도 다 점수로 들어가거든요.

Q. 이렇게 힘들게 명장이 되면 받는 혜택은 어떻게 되나요?

안유성 일단 국가에서 대통령이 주는 표창장을 받고요, 일시 장려금 2천만 원이 나와요. 그리고 계속 그 업에 종사하면서 후학들을 키워야 하고, 종사 장려금으로 1년에 3, 400만 원씩 꾸준히 받아요. 나라에서 ‘보물’처럼 케어하겠다는 거죠. 조리 명장뿐 아니라 97개 직종에 다 명장 제도가 있어요, AI 직종, 전자 분야, 용접, 도자기, 미용, 제빵까지요. 조리 명장은 저 포함해서 현재 17분이고, 16대 막내가 얼마 전에 들어왔는데 저보다 열 살이 많아요. 그래서 나이로는 제가 최연소인데, 군기는 또 세서 막내 명장도 제 앞에서는 꼼짝 못 합니다. (웃음)

Q. 처음 명장 타이틀을 얻으신 후 받은 장려금은 어디에 쓰셨어요?

안유성 후학들을 위해서 장학금으로 다 기부했어요. 사실 남들이 말하는 ‘7전 8기’로, 8번 도전해서 8번 만에 됐거든요. 7번째 도전할 때, 저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명장의 휘장을 꼭 어머니 목에 걸어드리고 싶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때는 사실 포기하고 ‘나는 이제 명장이 되기 힘든가 보다’ 싶었어요. 서류나 현장 실사 점수는 완벽하게 좋은데 계속 면접에서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포기를 많이 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덟 번째 도전을 했고, 그때 명장이 된 것 같아요.


Q. 어머니가 굉장히 큰 존재셨던 것 같아요. 흑백요리사에서 탈락하셨을 때도 어머니 사진 보고 멘탈을 잡으셨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나요. 요리를 시작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셨을까요?

안유성 그렇죠. 어머니가 나주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하셨는데, 바로 옆에 시장이 있어서 어머니가 “대파 사 와라”, “소금 사러 신안 가자”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고추도 신안 임자도 고추가 좋으니까 거기서 태양초로 사야 색깔이 잘 난다는 것까지, 이런 걸 어머니 때부터 배웠으니 어떻게 보면 요리의 스승이 어머니였던 것 같아요.

Q. 지금도 식재료에 신경 쓰시는 게 그때부터 이어진 거네요.

안유성 ‘식재료만큼은 좋은 걸 써야 손님들이 온다’는 게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던 것 같아요.

Q. 어머니는 나주곰탕(한식)이시고 셰프님은 일식이신데, 전혀 다르잖아요. 어머니 식당을 물려받을 생각은 안 하셨던 거예요?

안유성 어떻게 보면 그게 제일 편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어요. 어머니가 대통령들 식사도 대접하셨을 정도로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방문하실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었고, 1층부터 3층까지 하실 정도로 크게 식당을 하셨거든요.그때도 저한테는 그런 도전 정신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모든 걸 다 놔두고, 누나 지갑에서 만 원을 훔쳐 서울로 상경했어요.

Q. 왜 상경하신 거예요?

안유성 핑계일 수도 있는데, 제가 바다낚시를 좋아해서 한국해양대를 썼었어요. 그때는 선장이 되는 게, 참치를 잡는 게 꿈이었거든요. 지금도 참치를 잡고 있긴 하지만요. (웃음) 그런데 공부를 못하니까 당연히 떨어졌죠. 집에 면목이 없었고요. 그때가 86년, 88년 아시안게임·올림픽으로 한국 외식 산업이 급변하던 시기였어요. 그전엔 한식, 중식 정도밖에 없었는데 일식은 별로 없었거든요. 생선 좋아하고 잡는 것도 좋아하니까 일식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언젠가 저희 집에 공부 많이 하신 철학자 같은 분이 오셔서 손금을 봐주셨는데, 제 손금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막손’, 그러니까 손금이 일자였어요. 그분이 “이 손금을 가진 사람은 크게 성공하거나 크게 망한다, 근데 당신은 크게 성공할 팔자다”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주술처럼 마음에 새겨서 ‘나는 이 시골에서 이럴 사람이 아니다, 크게 성공해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싶었어요.

Q. 누나 지갑에서 만 원을 훔쳐서 서울로 오셨다고 하셨는데, 바로 일식으로 가신 거예요? 아는 분이 계셨던 거예요?

안유성 횟집에서 주방장을 하던 지인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때는 서울역 앞 공중전화, 그것도 단돈 50원밖에 없어서 그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했죠. 면접 볼 때까지 며칠은 먹고 잘 데가 없어서 걸어서 다녔고, 그때 당시 24시간 열려 있던 응급실 앞에서 노숙을 했던 것 같아요. TV도 있고 앉아 있을 데도 있었거든요.

Q. 다시 내려가실 법도 한데,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으셨다는 게 신기해요.

안유성 그때는 집에 갈 면목이 솔직히 없어서, ‘성공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렇게 직장에 들어갔는데, 6시부터 12시까지 근무를 하고 숙소 생활을 했어요. 손님이 끝나면 상 치우고, 그 방에서 자고요. 다행히 실내에서 잘 수 있게는 해줬어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6개월 후에, 그때까지 집에 전화 한 통 안 드렸다는 게 걱정되셔서 전화를 드렸어요. 공중전화 뒤에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까 저도 펑펑 울고 어머니도 우셨어요. 그다음 날 바로 어머니가 한복 곱게 입고 서울로 올라오셨더라고요. 나주 배 유명하니까 배 한 박스를 들고, 직원들 나눠주라고요.

Q. 예전 어머니들은 꼭 한복 입고 뭔가 주렁주렁 들고 오셨죠. 우리 아들 잘 봐달라고요.

안유성 맞아요. 어머니도 주무실 데가 없어서 가게에서 저랑 같이 주무셨고요. 어머니가 저녁에 출출하다고 하셔서 실력 발휘한다고 라면을 끓이는데, 일식집이니까 오징어랑 해산물도 있어서 멋있게 칼질을 한다고 하다가 손을 확 벤 거예요. 어머니 앞에서 그거 들키지 않으려고, 안 다친 손으로 꽉 잡고 어머니 가실 때까지 버텼던 게 생각나요.

Q.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몇 개월 만에 만난 아들이 해준 요리를 드시고요.

안유성 요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해물 라면이었는데, 어머니가 “맛있다, 맛있다” 해주시면서 “식당에서 일하니까 밥은 안 굶겠다” 하시더라고요. 엄청 걱정을 많이 하셨죠.

Q. 무슨 얘기를 많이 나누셨어요?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이었잖아요.

안유성 그때 어머니가 편지를 써주셨는데, 저는 이 편지를 평생 부적처럼 가지고 다녀요. “새 몸 건강하기를 바란다.  남을 너무 믿지 말고. 사랑한다.” 그때 당시에 어머니가 이런 표현을 하셨다는 게 저한테는 참 특별했어요.

Q. 명장이 되셔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여전히 아기였을 텐데요. 그래서 ‘사람 조심해라’ 이런 말씀을 하셨나 봐요.

안유성  서울에서는 ‘코 베어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딱 그런 시골 어머니의 마음이었죠. 그렇게 하루를 같이 보내고 어머니는 내려가셨어요.

Q. 서울에 좀 더 편하게 계시다 가시지, 왜 나주에 3층짜리 식당도 있으신데 하루만 있다 가셨을까요?

안유성 그렇게 하루 계시면 또 돈도 얼마 주고 가시고 하니까요. 저는 그때 기술을 배워서 이런 걸로 승부를 보고 싶었는데, 그때는 ‘셰프’라는 단어가 없었어요. 일제 잔재가 남아 있어서 저를 ‘김양’, ‘안군’ 이렇게 불렀거든요. 위에 주방장님이 “안구야, 안구나” 이렇게 부르셨죠. 그때는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못 쉬었어요. 쉬는 날이라 해도 “오늘 예약 많으니까 오늘 가게에서 일해야 된다” 하시면 그냥 못 쉬었어요.

Q. 지금 같지 않았죠.

안유성 그렇죠. 가게에서 자다가 새벽에 시장 다녀오는 주방장님이 “야, 쉬는 날이 어디 있어, 얼른 주방에 가서 일해” 하시면 또 나갔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Q. 어머니를 몇 개월 만에 뵙고, 그 이후에 진짜 서울살이가 시작된 거잖아요. 응원도 받으시고, 진정한 도전의 시작인 셈인데 그 이후로는 어떠셨어요?

안유성 그때 급여가 13만 원이었는데, 그래도 그걸 좀 모았던 것 같아요. 새벽에 강남에 가서 어학원도 다니고요.

Q. 가게는 어디에 있었어요?

안유성 그때는 부천에 일식집이 있었고, 거기서 일하다가, 강남 관세청 앞에 ‘다도’라는 유명한 일식집을 알게 됐어요. 1층부터 7층까지 있는데 주방장, 셰프들이 25명이나 있었어요. 그 주방장님이 부천에 사셔서 퇴근길에 꼭 소주 한잔 하고 가시길래, ‘저분을 잡아야겠다’ 싶어서 포장마차에서 술도 사드리면서 그렇게 강남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Q. 그렇게 강남으로 바로 스카우트되신 거네요.

안유성 그때부터 최고의 주방장님들 얼굴만 보면 쫓아다녔어요. ‘조선호텔 주방장님이 청담동에 새로 개업하셨다더라’ 하면 거기 가서 면접 보고 배우고, 그렇게 일로서 최고인 스승님들만 쫓아다녔던 것 같아요. 거기서 돈을 좀 모아서 제 돈으로 일본 연수도 가고, 그때는 비행기 안에서 담배도 필 수 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했던 것 같아요.

Q. 이야기를 들어보면 명장님은 돈보다 도전과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안유성 그랬던 것 같아요.


Q. 그렇게 지금의 명장이 되신 건데, 고생하시면서 좋은 분들 찾아뵙고 배웠다고는 해도 그게 다 고생이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 음식이 많이 생각나셨을 것 같아요.

안유성 제가 가장 힘이 됐던 게, 어머니가 손으로 이렇게 머리 고기 중에서 맛있는 부위를 한 점 발라서, 참치로 치면 볼살같이 맛있는 부위인데, 기름장에 착 묻혀서 “막둥아, 이거 한번 먹어봐라” 하고 주시던 그 한 점이에요. 그게 어찌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힘들 때면 그 생각이 많이 나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생각나는 게 어머니가 “막둥아, 이거 한 점 먹어봐라” 하시던 그 순간이고,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자 서울에서의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준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아요.

Q. 어머니 가게를 물려받으셨으면 편하게 흘러가셨을 수도 있고, 곰탕으로 또 다른 명장이 되셨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셀프로 궤도 이탈을 하셔서 험난한 길을 이어오신 건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뭘까요?

안유성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이게 제 원동력인 것 같아요. 제가 명장이 된 후에 흑백요리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 사실 더 이상 누구에게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거기서 안주했다면 흑백요리사도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제 인생의 굉장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도전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그 도전 정신이 있으면서도 저는 또 주방에 들어올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있잖아요. 그 일상이 그냥 제 주방에 있기 때문에, 저는 뭘 해도 이제는 마음이 편안해요.

Q. 지금은 다 이루셨고 지난 일이라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지만, 혹시 실패하신 경험은 없으세요?

안유성 영업하면서 여섯 번 정도 가게 문을 닫았어요.

Q. 그럴 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어떻게 이겨내셨는지도 궁금했어요.

안유성 여섯 번 가게 문을 닫을 때마다 직원들을 보내야 하고, 마무리하면서 전구 같은 것도 살릴 수 있는 건 빼내는 느낌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허무하고 굉장히 속상하죠.

Q. 아무리 도전을 즐기시고 그게 원동력이라 해도, 여섯 번이나 사업이 망하면 보통 멈추기 마련이고 겁이 날 법한데요.

안유성 여섯 번 계속 망하면서 노하우가 생긴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망하더라, 저렇게 하니까 망하더라.’ 이 노하우를 가지고 대학 강단에서도 그 경험을 쓸 수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것도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언젠가는 들더라고요.

Q. 도전 정신이 지금의 셰프님을 이 자리에 있게 한 것 같아요.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명장이 되신 아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셨을 것 같으세요?

안유성 어머니가 살아 계셔도 아마 저한테 “빵 배우지 말라”고,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비울 때가 아니면 되도록 주방을 지키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 저희 셰프들도 본인의 본연의 직업을 쭉 지켜가는 게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성공의 길이 아닐까 싶어요. “전방 지켜라, 전방 지켜라.”

Q. 어머니께 해드리고 싶은 요리는 뭐가 있으세요?

안유성 어머니가 예전엔 초밥을 잘 모르셨는데, 나중에는 은근히 초밥을 좋아하셨어요. 남도초밥도 좋아하셨는데, 연세가 드시고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에, 나주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왔는데 식사로 초밥이 먹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초밥을 해드렸는데, 다음 날 병원에 가셔야 하는데 전화를 안 받으셔서 병원에도 안 오셨다고 해서 알아보니 쓰러지셨던 거였어요. 그래도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해드린 초밥을 드시고 가셨다는 게, 마음이 조금은 덜 먹먹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Q.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조금 먹먹해지시는 게 느껴지네요. 지금 셰프님은 어머니의 요리를 나누면서 살고 계신 것 같기도 한데요. 재난 현장엔 언제나 가셨다고 들었어요. 곰탕이랑 김밥을 사 들고 무안 공항에도 가셔서 유가족분들을 위로하셨다고요.

안유성 네, 그때 사실 무안이 이렇게 가깝다는 게, 소식을 듣자마자 주방에서 손이 안 잡히더라고요. 얼른 김밥을 말아서 찾아갔는데, 현장에 가니 정말 아비규환이었어요. 그때는 ‘김밥이 문제가 아니라 그분들 옆에 제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처음엔 김밥을 해서 갔지만, 다음엔 곰탕도 가져가고, 그다음엔 새해였어요. 1월 1일이라 떡국을 하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얼른 뭘 드시고 기력을 찾으셔야 할 것 같아서 전복죽을 천 인분 정도 준비했어요. 이 소식을 듣고 흑백요리사에 출연했던 셰프들도 다 내려와 주셨어요.

Q. 정말 좋은 일 하십니다.

안유성  음식은 본인이 재난 현장이든 어떤 현장이든 직접 가보면, 말할 필요 없이 ‘아, 내가 이곳에 있어야겠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재능 기부는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Q. 셰프님이 위로를 전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분들에게 큰 힘을 얻게 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안유성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한 분 한 분 찾아오시더라고요. 그때는 경황이 없었는데, “그때 끓여줬던 전복죽이 우리 가족이 다시 일어서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저와 관계가 밀접한, 구청에서 근무하시는 분이었는데, 지역 상생 일자리재단 관련 미팅을 하다가 머뭇머뭇하시더니 따로 저를 따라 나오셔서, 그때 유가족이셨는데 그게 힘이 됐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계속 찾아오시면서 감사의 표시로 홍삼을 사 오신 분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오히려 제가 그분들한테 위로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나눔’이나 ‘재능 기부’라는 말도 있지만, 본연의 마음으로 이렇게 하다 보면 오히려 본인이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한번씩 들어요.

Q. 사실 봉사를 꽤 오랜 시간 지속하고 계신데, 처음 봉사를 시작한 이유가 점수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안유성  솔직히 그렇습니다. 명장에 도전하려면 미리미리 봉사 점수가 필요하거든요.

Q. 학교에서 방학 때 봉사활동 하는 거랑 비슷한 거네요.

안유성  맞아요, 사실 그 봉사 점수 때문에 시작했었는데, 그때 아이들을 데리고 장애인 봉사를 갔었어요. 봉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장애인 친구들 옆에 잘 안 가려고 하다가, 끝날 때쯤 되니까 그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고 밥도 주면서, 나중에는 떨어지기 싫다고 막 우는 거예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울컥울컥하더라고요. ‘이 봉사는 시작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진정한 봉사를 계속해야겠다’ 싶었어요. 봉사를 하고 오면 제가 느끼는 바가 크기 때문에, 다른 셰프들도 데리고 ‘사랑의 요리 봉사단’을 만들어서 같이 봉사를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부산에서도 셰프들이 오고, 서울에서 후배들이 와서 지금은 100여 명의 셰프들이 초밥으로 나눔 봉사를 하고 있어요. 장애인 가족분들이 봉사하는 초밥 먹는 날을 기다리실 정도예요. 어느 후배 셰프는 “봉사하면서 이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자존감이 이렇게 높아본 적은 처음”이라고 하더니, 다음 해에는 자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더라고요. 이렇게 일파만파로 많은 분들이 봉사에 참여하는 걸 보면서, ‘이 봉사만큼은 지속적으로 내가 할 일이다’ 싶어서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Q. 지난 36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늘 주방에 계시다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셰프님의 제자리인 주방을, 요즘은 어떤 마음으로 지키고 계신가요?

안유성  이제는 주방을 지키면서도, 제가 어느 지역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이 지역이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 식당에 오시는 것도 좋지만, 제 꿈인 ‘명장의 거리’를 만들어서 많은 분들이 그 거리에 들러 음식을 즐기고, 근처 애호박찌개도 드시고, 양동통닭 가서 맥주도 한잔 하시면서 머무를 수 있는 도시가 되면 좋겠어요. 더 큰 꿈은, 프랑스의 꼬르동 블루, 미국의 CIA 같은 요리학교처럼요.

제 막내아들도 지금 일본 츠지 요리학교에서 요리를 배우면서 그 커리큘럼도 익히고 있어요. 이제는 우리 한국에서도 낼 수 있는 4대 요리학교를 제 명장의 거리에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Q. 셰프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단순히 음식을 만드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주방에서의 의미까지 이어가고 계신 것 같아요.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나눔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크게 변화는 없을 거예요. 한가한 주말에 산에 가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거든요. 거기서 즐기다가 다시 주방에 들어왔을 때의 그 평온함, 이런 게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늘 일상적이고 반복된 일을 하면서도 그 안에 행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요.

 


<제자리로 돌아오면 모두 다 일상> 3화 안유성 셰프편 보러가기